<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 책에 대한 짧은 생각>

<시를 쓰는 이유> 라는 책을 읽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정말 ‘후려친’ (인간이 쓴) 시집이 얼마나 있었나, 생각해보면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시알못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인의 시집이라면 더욱 그렇다. 작년쯤 이런 저런 이유로 시를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대체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답답해서 시를 읽는 법에 대한 이런저런 책도 읽었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다룬 책도 읽어봤다.

그 책들은 시는 이해받기 위해 쓰여진 글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 행간과 행간 사이 침묵으로 말하는 글이라고, 그냥 내가 받은 느낌 그대로를 소중히 여기라고 했다. 근데 애초에 그게 안되는 게 나의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시 즐길 줄을 모른다. 어쩌면 순수한 마음으로 문학을 사랑하기보단 ‘시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내 그 불손한 마음이 시의 세계와 공명하지 못했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최근 이 시집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보다 시를 잘 읽을 것 같은 사람 몇에게 보여줬다. 책을 잽싸게 펼쳐 커버에 있는 ‘인공지능’ 같은 단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은 후 소감을 말해달라고 했다. 아마츄어 인스타 시인 정도의 수준이라는 비교적 일관된 피드백이 돌아왔다. 한 친구는 이 책 속의 시들이 마음에 ‘안착되지 못한다’며 허연 시인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기껏 복숭아씨만한 사람의 눈이라는 게 여간 영묘하지 않아서 그것 하나 때문에 생을 다 바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허연, 눈빛)


최근 ChatGPT 에 대한 정말 많은 글을 읽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이 녀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많은 초점을 맞추는 듯 하다. 신기한 기술이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 같아 조금 애처롭기도 하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이 여전히 클래식인 이유, 이승우 작가의 거미줄 같은 문장, 무슨 무슨 작가만이 가능한 인간 영혼을 건드리는… 등등. 인간의 영역에는 끝끝내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확신 넘치는 어조에서 두려움이 감지되는 건 기분 탓일까. 나는 그렇다. 인공지능이 general intelligence의 레벨까지 올라가도 정복하지 못할 그 ‘한 끝’의 차이가 있으리라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중요한 건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들어간 책들 중 그 ‘한 끝’을 제대로 보여준 책이 몇권이나 있었을까. 그 책들이 정말 인간영혼을 전율케 하는 문학적 성취로 성공을 거뒀나? 모두가 그렇진 않다. 심지어 그중 몇몇은 소스만 잘 피딩해주면 이미 AI도 비슷하게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지만 지금 다수의 독자들이 괜찮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글이 인공지능 엔진에 의해 대량 생산될 수 있는 때는 (적어도 기술적으론)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출판사 입장에서 비슷한 수준의 책을 하루 1000권도 찍어낼 수 있는데 굳이 비싸게 인세 주고 인간 작가를 고용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규모의 경제로 인해 책 값은 떨어지고 어떤 독자들은 좋아라 할 것이다 (…) 어쩌면 인공지능이 쓰고 사람은 이름만 빌려주는 사업이 성행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성행할 것이다. 여기에는 합당한 규제가 필요할 것이고.. 물론 책의 장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자서전이나 개인적 경험을 다룬 에세이처럼 책 자체보다 그 내용 뒤 사람이 중요한 분야는 오래 남을 것이다. 적어도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전까진.

독자들이 인공지능이 쓴 책을 수용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점진적으로 그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한다. 82세의 할머니도 돌봄 로봇과 1년만 지내면 감정적으로 동화돼서 로봇을 사람처럼 대하게 되는 걸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MIT 연구진이 진행한 실제 사례..) 하물며 태어날 때부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며 메타버스에서 자아를 구축한 아이라면 어떨까. 그때라면 인공지능이 쓴 ‘삶의 의미를 찾는 45가지 방법’을 읽고 감동하는 데 어떠한 심리적 허들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중 ‘인간만이 가능한 어떤 문학적/예술적 성취가 있을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책을 사랑하지만 시알못인 내가 시에 대해선 그 한 끝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좋은 글에 대한 심미안을 가졌고 거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고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런 무리들이 언제나 소수였다는 것은 합당한 지적이다.)

책의 세상이 인공지능에 의해 disrupt 되기 시작하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모르겠지만 그게 고도화되고 나면 인간만이 쓸 수 있는 글은 소수의 고급독자를 위한 니치마켓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런 글은 보통 힘들게 읽히기 때문이다. 또 모른다. MZ가 바이닐과 워크맨을 찾 듯, 몇 십년 후의 ??세대는 ‘인간이 쓴 글’을 힙하다고 생각해 종이책이 유행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시대를 당연한 역사의 수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디스토피아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챗GPT의 시대에 우리가 던져야하는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덧붙여 이런 변화가 우리의 글쓰기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출판 까지의 허들이 높아져 아무나 책을 낼 수 없게 될까?
몸을 위해 정기적 근육 운동이 필요하듯, 인공지능 시대 인간됨을 상기하기 위한, 맨정신으로 살기 위한 기초체력 단련으로서의 글쓰기가 떠오를 수 있을지도(?)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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