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보았네 (Seeing Voices) – 올리버 삭스

‘좋은 책’의 기준이 뭘까요. 여러 차례 밝혔듯, 저에게 좋은 책이란 ‘익숙한 기존의 사고체계를 낯설게 만들고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책은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1) 농인 세계의 역사, 2) 수어라는 언어/사고체계에 대한 저자의 사유, 그리고 3) 갤러 댓 대학을 통해 보는 농인 커뮤니티의 미래를 차례로 다룹니다. 독자가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얻어갈 수 있는 질문도 다를 것 같은데요. 저의 경우 생각의 가지가 두 개의 방향으로 뻗어갔는데,

첫 번째 론 수어가 그 자체로 완벽한 언어/사고체계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이야길 한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이따금 길거리에서 마주친 농인들이 수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며 ‘불편할 것 같다’ 혹은 ‘저렇게 온전한 대화가 가능할까?’라고 느낀 적은 없으셨나요? 저는 그랬거든요. 즉, 수어는 음성언어의 불완전한 대체물, 열등한 체계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이것이 바로 농인 커뮤니티가 끊임없이 음성언어의 사용을 강요받았던 이유입니다. 저자는 이런 오해와 차별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수어를 지켜오고, 싸워온 온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조명합니다.

문제는, 들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수어마저 제대로 배울 수 없다면 그는 ‘언어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언어가 없기에 ‘생각’이 불가능해집니다. 사물/이미지의 피상적 세계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세계를 구성하는 상징(symbols)의 세계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영어에 ‘deaf and dumb’같이 요즘 기준으론 차별적인 표현이 존재하는 게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실 ‘언어가 없는 인간’이 어떤 것인지 청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고, 이런 독자를 돕기 위해 저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들을 수 없었음에도 다양한 이유로 수어조차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사례를 가져옵니다. 언어와 사유, 세계관의 관계. 그리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드는 대목이죠.

어쨌든. 수어는 하나의 완벽한 언어체계입니다. 수’화’가 아닌 수’어’가 바른 표현인 이유입니다.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유실됐겠지만 저자가 ‘수어’의 영단어인 ‘Sign’의 S를 대문자로 표기한 것도 같은 이유지요. English나 Korean이 고유 대명사인 것처럼요. 수어 원어민은 수어로 생각하고, 꿈을 꿉니다. 이게 실제로 어떤 느낌일지, 이 모든 것들을 음성언어로 수행하는 청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죠? 이 책을 통해 얻은 두 번째 생각의 가지로 이어집니다.

순전히 청인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수어라는 세계가 우리가 느끼는 인식의 한계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어는 ‘공간성’을 특징으로 하는 비주얼 언어입니다. 그래서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공간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가지게 되며, 당연히 이와 관련된 인지능력들이 발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움직이는 사물의 방향을 인식하는 속도와 정확성이 남다르게 발달한다던지…) 뤽 베송 감독의 ‘루시’라는 영화 보셨나요? 혹은 테드 챵의 단편 ‘이해’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평균적으로 10%가 사용된다고 알려진 인간 뇌의 가소성과 잠재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대목이죠. 음악이나 무용에서 일정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문외한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수어 또한 우리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줄 어떤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부족한 글을 끄적일 때마다 늘 언어의 빈곤으로 울적해지는 저라서, 바로 이런 이유로 수화란 언어체계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됐습니다.

조금 관심이 생기셨다면 농인 비주얼 아티스트인 Christine Sun Kim의 TED 토크를 추천드립니다. 이 책을 읽고도 여전히 모호했던 지점들이 멋지게 갈무리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소리’는 어떻게 인식될까요? 소리로 인해 느껴지는 진동, 혹은 특정 소리를 들었을 때 사람들의 표정 (즉, 관계성) 또한 ‘소리’란 현실의 일부라는 게 또 한 번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수’화’가 더 익숙했던 무지의 상태에서 여기까지 생각이 와닿은 저의 세계는 책을 읽기 전과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일반적 인식의 범위 너머 존재하는 감각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했던 저자의 지적 여정에 잠시 동행하는 기분, 더 많은 분들이 느껴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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