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The Reluctant Fundamentalist) – 모신 하미드

문학에서 아득히 멀어져있던 날 다시 소설로 끌어와준 책은 2016년 한강의 ‘소년이 온다’ 였다.

베를린으로 돌아가던 비행기에서 너무나 책에 몰입했던 나머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쯤 온몸의 근육을 쥐어 짠 것처럼 실제로 몸이 아팠다. 목소리 잔뜩 쉰 할아버지들이 장풍을 마구 발사하는 교회부흥회에서나 경험할 법한, 내겐 흡사 영적체험 같았던 강렬한 경험. 이 순간이 내겐 복이자 독이었던 것 같다. 이후 꽤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문학은 내게 다신 불세례를 내려주지 않았고 난 매년 흐릿해져가는 그날의 기억으로 근근히 버텨왔다.

‘소년이온다’ 보다 좋은 책을 만나지 못했단 게 아니다. 단지 내게있어 사무치게 개인적인 소재가 솜씨 좋은 이야기꾼에 의해 잘 다뤄졌을 때 생기는 내면의 대폭발. 내가 문학을 다시 읽게 된 계기. 그런 갈증이 늘 있었다. 이 책,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를 읽으며 참 오랜만에 목을 축인다. 첫경험만큼 강렬하진 않지만 책이 남기고 간 상흔을 더듬으며 분명히 알 수 있다. 아,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어버렸구나.

사회주류에 편입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향한 적대감을 느끼게되는 상태, 알게 모르게 쌓여가는 피해의식, 나의 본질적인 ‘다름’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아픔, 이런 양가적이고 복잡미묘한 심정들을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담아낸 작품이다 (겨우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내게 더 흥미롭게 다가온 건 주인공 찬게즈와 그가 동경하는 대상인 에리카가 대치되는 지점이다. 에리카는 혼자 있기가 두렵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작가가 되길 열망했던 그가 쓴 이야기는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그 책을 읽고나면 작가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모든게 수량화 되어야만 하는 시스템, 산만한 대량생산의 결과물 같은 것으로 상정된 인물이 아닐까 생각됐다. (이 인물이 미국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건 이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Am’Ericaㅎㅎ)

반면 찬게즈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대목이지만 내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고독할 수 있단 건 자기 내면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찬게즈와 에리카의 가장 큰 차이다. 그 때문에 찬게즈는 심연속에 빠져있는 에리카가 가장 대면하기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그의 ‘균형을 깰 수’ 있었으며 끝내는 근본주의의 도그마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선 멋진신세계 의 버나드 마르크스를 떠올렸다. 물론 마음속에 고독하나 품고 있던 그는 결국 변화가 되길 거부했지만.

역자는 그의 이름인 Changez가 징기스칸 (Genghis)에서 왔을 것이라 해석했지만 사실 ‘변화(change)’를 상징한다고 보면 더 흥미롭다. 좀 더 나아가자면 미국적 근본주의와 그 시스템에 대한 희망 내지는 대안으로 그려졌다고도 말 할 수 있다. 찬게즈가 결국 향하게된 종착지가 문학과 네루다라는 것은 이걸 더욱 분명히 해준다. 대량생산, 수량화, 포디즘… 이것들과 대비되는 고독, 네루다… 문학. (다시 한번 멋진 신세계가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지점.)

더 길게 쓰고 싶지만 스포를 피하기가 힘들어 여기까지. 사족을 조금 달자면 오랜만에 영/한을 비교하며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국문판이 조금 아쉬웠다. 특히 대학동기인 에리카와 찬게즈 사이 대화가 모두 존댓말로 번역됐는데 결과적으로 원문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와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 에리카가 때때로 한없이 먼 존재란 걸 염두에 둔 선택이라는 의견도 들었지만 그렇다면 이건 역자의 과도한 개입이 아니었을까.

이민자의 정체성이란 건 그 자체로 내겐 끝이 없는 글감이고 실제로 내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글감이기도한데 이 책을 통해 흥미로운 질문거리도 얻었다. 파키스탄→ 미국 혹은 한국→영국처럼 상대적 약소국의 이민자가 새로운 환경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경험이 그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할까? 예를들어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大미합중국인은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떤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가… 같은 질문들.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국을 대표하는 파키스탄계 배우, 리즈 아메드가 찬게즈 역할을 맡았다. 리스본행야간열차 속 제레미 아이언스의 경우처럼 배우가 너무 멋있어서 책에서 느낀 이미지를 생각하면 좀 배신당하는 느낌… (한국에선 개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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