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난 오늘 시칠리아에 있어야 했다. 계획대로라면.

전염병이 모든 걸 무로 되돌리는 동안 난 결제버튼보다 취소버튼을 자주 클릭했다. 매일 같이 수천 수만이 죽어가는 전지구적 아우성 속에서 무산된 휴가 같은 건 아쉬워 할 거리조차 되지 못했고, 이뤄지지 않은 여행은 사이프러스 나무로 둘러 쌓인 근사한 숙소가 아닌 우리집뒷마당에서 찍은 인증샷과 함께 종결됐다.

4월말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가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시칠리아란 희망은 이미 완전히 꺼진 불씨였고, 그럼에도 난 굳이 이 책을 샀고, 굳이 오늘을 위해 아껴뒀다.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때때로 이런 가학적 독서를 자처하기도 한다.

작년 9월 포르투에서 작가의 전작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이유’에 방점을 두려고 여행경험을 재료로 쓴 전작에 비해 , 이 책은 여행의 기록 그 자체다. 박학다식한 저자의 레퍼런스는 여전히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나, ‘여행의 이유’나‘읽다’의 밑줄 긋게 만드는 통찰을 기대한 독자는 실망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필력이 워낙 출중하니 술술 읽힌다.

‘여행의 이유’에서 작가는 여행은 ‘일상의 부재’라고 했다. 낯선 환경 속에 던져진 여행자는 오로지 현재만을 살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는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도 않고, 미래를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오직 현재만이 있는 시간. 시작과 끝이 정해진 그 시간 안에서 여행자는 일상을 유예 받는다. 포르투에서 일주일간 난 그런 여행자의 신분을 맘껏 누리기 위해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배제하는 작업에 매진했고 짧은 여행의 경험은 현재에 대한 어떤 소환 가능한 ‘감각’으로 내 안에 남아 있다.

1년이 지나 그의 또 다른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난 ‘여행이 부재한 일상’을 생각한다. (토마스 만이 말한 ‘경험되는 사건이 부재하여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리는’ 시간도 아마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나의 카르페디엠은 여전히 미래를 힐끔힐끔 쳐다보기에 항상 듣기 좋은 말에 그쳐버리고 감각으로 남아있던 여행의 기술은 갈 수록 무뎌져 조바심이 난다. 내가 계속 책이란 세계에 끌리는 건 그만큼 찐한 현재를 갈망 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공감각적 독서랍시고 시칠리아 느낌(?)의 향수와 음악까지 선곡한 노력 덕분이었을까. (생일날 집에만 있어야하니 이렇게 애처로워진다😂) 책을 덮고나니 이뤄지지 않은 여행에 대한 아쉬움보단 요 몇달 관광객이 끊겨버렸을 시칠리아의 속앓이를 헤아리게 된다. 생선가게 프란체스코씨와 택시기사 빌리니씨가 부디 안녕하기를.

One thought on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1. 공감각적 독서가
    킬링포인트네요.

    출판사들이 탐낼 구성이네요 ㅎㅎ 꼴라보 제안해보고 싶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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