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화두인 시대다. Growth mindset 같은 표현이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좋은 것을 부지런히 보고, 듣고, 경험하여 기록을 남겨야한다는 생각이 강박에 가깝다 느껴질 정도다. 소화해야할 정보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져 개인이 느끼는 피로감의 반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메모하는 법, 생각 정리법, 그것을 다시 내 것으로 재생산하는 프로세스에 관한 글들이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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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wth mindset 너머에 좀 더 실용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Growth Hack’이 있다. 쉽게 말해 단기간 폭발적 성장을 위한 지름길 같은 것으로서 역시 처음엔 기업을 위한 표현이었다가 개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성장에 이르게 하는 방법론으로서 소비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 – 인간 정신의 성장이 과연 ‘해킹’이 가능한 종류의 것인가? 나는 인간 정신에 대한 이런 엔지니어링적인 관점을 경계한다. A를 보고 B를 들어 C를 마스터한 후 D와 융합하면 내가 원하는 E에 이를 수 있다는 그런 리니어한 종류의 성장은 인간 정신의 신비를 제거시킨 헐벗은 인간론을 드러낼 뿐이다. 인풋에 따라 아웃풋을 내는 기계와 다를 게 없다. (인간을 이렇게 바라보니 당연히 성장의 방향성 같은 건 고려될 여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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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에 대해 이런 저런 수식어가 붙는다 – 교양소설, 시대소설, 시간소설 등. 나에겐 ‘성장 소설’로 읽혔다. 이야기는 1차대전의 시작으로부터 7년전,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 (HC)가 일련의 사건으로 베르크호프라는 스위스 산중 요양원에 뜻하지 않게 머물게 되며 시작 된다. 인본주의자 (세템브리니), 예수회 사제이자 반자본주의자 (나프타), 건강과 쾌락을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적 인물 (페퍼코른) 들이 공존하는 요양원은 19세기 유럽사회의 소우주다. 그들과의 조우를 통해 HC의 정신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성장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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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만 깔아주면 입에 모터가 달렸는지 세계정세와 인간 정신사에 대해 달변을 토해내는 요양원 동기들 사이에서 한참 갈팡질팡하는 HC는 당시 유럽 평균적 지식인의 정신 그 자체. 거의 900페이지에 걸친 이런 혼란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사건은 6장에 와서야 도래한다. 스키를 타러 나갔다가 길을 잃고 눈바람 속에서 얼어 죽을 뻔하며 온몸으로 경험하는 순간이다. 시간의 투자와 리소스의 축적을 통한 계획적 성장이 아닌, 연금술적 도약. 그제서야 HC는 900쪽에 걸친 수 많은 이야기들을 (그것이 옳던 그르던) 비로소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거대한 지적 산맥과 같던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를 ‘수다쟁이들’이라고 치부해버릴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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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연금술을 행하려면 재료가 필요하다. 바로 6장에 이르기까지 축적 된 ‘시간’이다. 날카로운 관찰자인 세템브리니가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객관적’이라고 평한 우리의 주인공은 사상실험에 자신을 던진 후 모든 사상과 일정 거리를 둔 채로 그 재료를 축적해 간다. 그리고 요양원에서의 첫 1년반이 매우 밀도있게 묘사된다. (지나치게 밀도 있어서 읽기를 그만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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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참신하고 흥미로운 경우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단조롭고 공허한 경우가 그 반대라고 하는게 일반적인데 사실 중요한건 사건의 유무로서, 시간단위를 아주 크게 하면 시간의 흐름에 넓이, 무게, 부피가 주어지기때문에 사건이 풍부한 세월은 훨씬 더 천천히 지나간다. 따라서 우리가 지루함이라고 명명하는 것, 그것은 사실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해 생겨나는 시간의 병적인 단축이다.” (p.202)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는 것 혹은 적어도 희미해지는 것이다. 청춘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느껴지고, 그 후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역시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함에 틀림없다.”
이 책의 핵심적 주제인 시간에 대한 이런 이해를 작가는 작품의 구성 자체로 드러낸다. HC개인에게 유의미한 사건들로 가득차 있던 첫 7주를 위해 1권 전체가 할애되고, 3권 마지막 시점에선 1년 반이 흘러 있고, 마지막 챕터에선 갑자기 5년 반이 훌쩍 지나 주인공은 요양원 7년차의 프로 요양러가 되어있는 것이다. 시간이 급격히 가속한 이유는 그의 삶을 사건으로 채워주던 인상적 인물들이 하나 둘 이런저런 이유로 요양원을 떠나게 되며 그가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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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풍부한 세월은 우리들 인생에 얼마나 자주 찾아와 줄까? 모든 게 정지해버린 코로나바이러스의 시간이 꼭 ‘산 아래’와는 다른 베르크호프 요양원의 시간처럼 흐르는 것 같다는, 그런 마법에 걸린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현재만을 살 수 있는 우린 지금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 재미와 흥미로움에 힘껏 헌신하지만 정말 내적 성장을 갈망하는 인간이라면 그런 익사이팅함 속에서 조차도 무감각과 익숙함에 대해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그러다보면 나의 계획으론 가능하지 않은 어떤 연금술적 순간이 선물처럼 찾아온다고.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읽었다. (물론 이 책의 백미는 주인공이 6장의 엄청난 도약의 순간 불과 한 시간 이후 그 모든 깨달음을 망각하는 아이러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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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중엔 정말 끝이 없는 산을 오르는 느낌이었고, 원래 한권으로 기획 된 책이 1차대전을 겪으며 작가의 정신적 사상적 변화와 함께 길게 늘어진 느낌도 없지 않다. 출간 25년 이후 독자들에게 쓴 글에서 토마스 만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최소 두번 읽기를 권했다는데 (사양하겠습니다..😉), 천천히 공을 들였다면 분명 다르게 읽혔을 작품이란 생각. 그렇다해도, 스토리 중심이 전개가 아니기에 적당한 속독을 곁들여 읽으면 지적인 만족감과 함께 얻어갈 게 많은 책이다. 단, 서양 사상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은 있어야 읽을 수 있기에 어느 정도의 진입장벽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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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 ‘어느 독일인의 삶’에서 베르크호프가 등장하는 데 무려 히틀러의 별장이다ㅎㅎㅎ 1차대전 전후로 집필된 작품이니 출간 이후 생긴 일인데, 나치를 반대해다 망명까지 해야했던 작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 미국으로 건너 간 토마스 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거 참모역을 맡게 되고 그해 11월 루스벨트가 당선됐다. #킹메이커
– 세템브리니가 HC를 부를 때 사용하는 ‘인생의 걱정거리 자식’이란 표현이 썩 맘에 들었는데, 이게 영어론 ‘Life’s delicate child’. 개인적으론 영어 표현이 더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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