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다카시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름은 여러차례 들어봤지만 그의 책을 읽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그는 ‘애서가’의 카테고리로 분류될 수는 없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가 추구하는 사랑의 대상은 책 자체가 아니라 평생을 걸쳐도 다다를 수 없는, 불가능한 지(知)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의 ‘애서가’보단 ‘근면한 지식노동자’ 같은 수식어가 더 적합하겠다.

저자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는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아니다.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인터뷰 질문에 대해 ‘책과의 만남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말하며 학창시절 남이 추천해 준 책을 찾아 읽었던 걸 ‘쓸 데 없는 짓’으로 회고하는 저자를 보며 대서가의 서제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집어든 독자는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긴 ‘다치바나 다카시의 근면한 지적편력’같은 제목이 팔릴 리가 없잖아…)

내가 이 책을 읽고나면 내 주변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주제가 있었는데 바로 픽션문학에 대한 저자의 견해이다.

“젊은 시절에는 오직 목적으로서의 독서가 중심이어서 대학 시절에 수업도 빠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원하는 책만 읽었습니다 … 특히 문학 서적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구미 문학에 관해서는 당시 일본 독서광 100명중 한 사람에 포함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 (대학 졸업 후 취재 기자로 일을 시작한 후) 논픽션 서적을 탐독하면서 문학가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현실과 비교할 때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건 한가운데로 직접 뛰어들어가 그 사건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생생하게 사건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눌 때면, 활자화된 논픽션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빈약한 상상력의 산물인 픽션을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나로선 쉽게 수긍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일단 픽션도, 논픽션도 그처럼 단정적으로 말할 만큼 넓고 깊게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현장의 생생함을 느껴보지도 못했으며, 사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책표지에 ‘지의 거인’이라고 소개된 저자에게 알게모르게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

저자와 비슷하게 나 또한 고등학교무렵까지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지만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완독한 문학작품이라곤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돌이켜보건데 내 경우는 논픽션의 비교할 수 없는 재미를 알아서라기보단 오히려 픽션의 재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였기 때문이었다. 2014년 베를린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문학 작품의 매력을 다시 느꼈고 그 이후부턴 논픽션만큼이나 픽션을 즐겨 찾고 있다. 그러니 조금 돌려 말하자면, 이건 책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느냐의 질문과 닿아 있는 게 아닐까. 장편소설, 미스터리 등 엔터테인먼트 계통의 책, 논픽션 가운데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써 내려가 흐름을 놓치면 나중에 도저히 알 수 없게 되는 책등을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읽는 책으로 분류하는 대목을 읽다보면 저자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가 서평을 쓰는 방식과 목적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과 그들이 쓰는 ‘맛깔 나는’ 문장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 나의 서평은 그렇게 취미로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세상에는 취미로 서평을 쓰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한 번도 펼쳐 볼 일이 없는 책가운데, 그들이 좋아하는 책보다 몇 배나 귀중한 책이 산더미처럼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나의 서평은 그런 책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문학의 가치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얻어지는 상상력 또한 취재에 필요한 어떤 능력과 연결 짓는 것을 보면 결국 실재적 실용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개인적으론 김영하나 하루키가 말한 ‘무쓸모함’, ‘비효율성’이 바로 문학의 참 쓸모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생산성 극대화를 추구하는 세상에 문학을 읽는 행위는 어떤 숭고한 상징성까지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다치바나 다카시라면 이런 견해에 대해 어떻게 대답했을까 조금 궁금했던 대목.

이런 견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진지하게 추구하며 걸어 온 ‘앎의 길’은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생동감 넘치는 매력이 있었다. 문학청년이었던 자신이 보다 실제적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논픽션 책을 읽게 되고, 직장 생활을 하며 세속에 너무 물들었다는 느낌을 벗어나고자 형이상학을 공부하게 되고, 이후 취재글을 쓰면서 본격적인 글쓰기의 길로 들어갔다고 회고하는 부분을 읽다보면 저자가 이 과정 가운데서 꾸준하게 진지했고 또 의지적으로 이런 선택들을 내려왔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냉정한 자기 성찰이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자기 지적편력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저런 깔끔함은 솔직히 좀 많이 멋지다.

사실 전혀 몰랐던 주제를 오로지 독학을 통해 전직 내각 법제국 장관이나 교수등 해당 주제 일류 전문가들과 토론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저자의 방식을 일반사람이 쉽게 적용하기란 어려워보인다. (새로운 영역의 일을 할 땐 해당주제에 대해 최소 서가 2단에서 10단의 책을 읽는다고 하는데..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나 방법론적인 것들은 그저 흥미로 읽으면 충분할 것이고, 대신 독서에 관한 저자의 조금 덜 보편적인 스탠스와 남다른 지적편력을 통해 얻어갈 게 충분한 책이다. 취재 방법론에 대한 내용에서도 여러번 밑줄을 그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문학적인 요소가 있는 논픽션 같다는 나름의 결론도 내렸다. 오래두고 생각나면 가끔씩 들춰보고 싶은 책. 일독을 권한다.

“문학을 통해 정신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사물을 보는 눈이 사려 깊지 못합니다.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문학이라는 세계는 처음 겉으로 나타난 것을 한 번 뒤집어 보면 다르게 보이고, 다시 그것을 뒤집어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표면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문학인 것입니다 … 또 하난의 영향이라면, 특히 문학 작품을 읽음으로써 얻어지고 길러지는 상상력이 아닐까 합니다. 취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결국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 상대방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 전문가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을 제기하는 전문가와는 논쟁이 될리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안그렇습니까? 전문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들의 논리를 축적시켜 내린 결론이라도, 밖에서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전문적인 지식으로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좀처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사뭇 재미있습니다.”

“어떤 한권의 책도 한장의 도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도표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그런 도표를 그려가면서 책을 읽어 보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을 때 단어가 표현하는 그대로 문장을 읽거나 문장이 표현하는 그대로 책 전체를 읽으려 하지 말고, 책 전체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그 흐름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책을 읽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충고 한마디! 책에 쓰여 있다고 해서 무엇이건 다 믿지는 말아라. 자신이 직접 손에 들고 확인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말은 믿지 말아라. 이 책도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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