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우리집엔 그날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책자가 하나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해둔 책. 어린 마음에 화들짝 놀라 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뒀었다. 돌이켜보니, 소년은 그렇게 한번 내게 왔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난 참 많이 울었다.
슬픔도 연민도 아닌 마치 그저 답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책을 읽으며 몸이 아픈 듯한 경험을 한건 처음이었다. 이 책을 시작하고 끝마친 베를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난 맨정신이기가 힘들어 위스키가 필요했을 정도였으니까.
한국에 있는동안 뭣도 모르고 몇몇분께 이 책을 선물하고 다녔다. 쉽게 권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냐고, 직접 보진 못했지만 증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이런 질문의 무게를 느끼게 되어서 그렇다.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부질없게 느껴져 그저 숙연해지는 때가 있다. 놀라운 경험을 선물한 한강 작가에게 박수를, 그리고 여전히 살아감 그 자체로 증언하고 있는 소년들에게 마음다해 응원을 보내며…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갈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도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 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 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